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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원주민의 조약 시대와 영토 상실: 협상과 저항의 시기 (1815~1870)

단풍길 나그네 2025. 4. 17. 11:27

캐나다 원주민의 조약 시대와 영토 상실: 협상과 저항의 시기 (1815~1870)

1815년부터 1870년까지, 캐나다 원주민(First Nations, Métis, Inuit)은 유럽 식민지 세력과의 조약 체결을 통해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이른바 조약 시대는 원주민의 영토를 체계적으로 축소시키며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꿨습니다. 번호 조약, 로빈슨 조약, 보호구역(Reserve) 시스템, 그리고 서부로의 식민지 확장에 맞선 저항은 이 시기의 핵심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원주민은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협상과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 글은 조약의 배경과 그로 인한 장기적 영향을 탐구하며, 원주민의 전략과 도전을 조명합니다.

번호 조약과 로빈슨 조약: 배경과 목적

19세기 초, 영국 식민 당국은 캐나다의 영토 확장을 위해 원주민과의 조약 체결을 본격화했습니다. **로빈슨 조약(Robinson Treaties, 1850)**은 이 과정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온타리오 북부의 Ojibwe 부족과 체결된 이 조약은 수피리어 호와 휴런 호 주변의 광물 자원 개발을 위해 원주민의 토지 권리를 양도받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영국은 연금, 사냥·어업권, 보호구역 제공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광업과 정착을 위한 길을 열었습니다.

**번호 조약(Numbered Treaties, 1871~1921)**은 서부 캐나다(오늘날 매니토바, 서스캐처원, 앨버타)에서 체결된 일련의 조약으로, 1번부터 11번까지 번호가 붙여졌습니다. 이 조약들은 1867년 캐나다 연방 형성 이후 서부로의 철도 건설과 농업 정착을 촉진하기 위해 추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번 조약(1871)**은 CreeOjibwe 부족과 체결되어 매니토바 남부의 토지를 양도받았고, **3번 조약(1873)**은 서스캐처원 강 유역의 농지를 확보했습니다. 영국과 캐나다 정부는 조약을 통해 원주민의 저항을 무마하고, 서부 확장을 합법화하려 했습니다.

 

원주민의 조약 협상 전략과 오해

원주민은 조약 협상을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했습니다. CreeOjibwe 지도자들은 조약을 상호 존중과 공유의 협정으로 이해했으며, 토지를 완전히 양도하는 대신 사용권을 공유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Treaty 1 협상에서 Cree 지도자 Yellowquill은 사냥과 어업권 보장을 강하게 요구했고, 연금과 농업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원주민은 구전 전통에 따라 협상의 세부 사항을 기억했으며, 이를 후대에 전했습니다.

그러나 문화적·언어적 오해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습니다. 영국과 캐나다 협상가들은 조약을 법적 양도 문서로 간주했지만, 원주민은 이를 우정과 평화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번역 오류와 애매한 용어도 갈등을 키웠습니다. 예를 들어, “cede”라는 단어는 원주민 언어로 “공유”로 오해되곤 했습니다. 또한, 조약에 명시된 연금(예: 1인당 연간 5달러)은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아 실질적 가치가 떨어졌고, 약속된 농기구와 씨앗은 종종 늦게 도착하거나 품질이 낮았습니다. 이러한 오해와 불이행은 원주민의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초기 보호구역 시스템: 새로운 삶의 시작

조약의 주요 결과 중 하나는 보호구역(Reserve) 시스템의 도입이었습니다. 보호구역은 원주민이 거주하도록 지정된 특정 토지로, 조약에서 약속된 사냥·어업권과 농업 지원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Treaty 1은 매니토바의 Peguis First Nation에 보호구역을 할당했으며, 로빈슨 조약은 온타리오의 Garden River First Nation을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보호구역은 원주민의 이동성을 제한하고 전통적 생활 방식을 위협했습니다. 많은 보호구역은 비옥하지 않은 땅에 위치했고, 크기도 부족했습니다. 예를 들어, Cree 부족은 넓은 사냥터를 잃고 좁은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당하며 버팔로 사냥 기반의 경제를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캐나다 정부는 보호구역을 동화 정책의 도구로 사용해 원주민을 농업에 종사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이는 원주민의 문화와 자치권을 약화시키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서부 식민지 확장과 원주민 저항: Red River Rebellion

서부로의 식민지 확장은 원주민과 Métis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겼습니다. 1869년, 캐나다 정부는 Hudson’s Bay Company로부터 루퍼트 랜드(Rupert’s Land, 오늘날 매니토바와 서스캐처원 일부)를 매입하며 서부 개발을 가속화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주민과 Métis의 권리는 무시되었고, 이는 **Red River Rebellion(1869~1870)**으로 이어졌습니다.

Métis 지도자 Louis Riel은 Red River 지역의 토지 조사와 정착민 유입에 반발해 임시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Métis는 자신들의 토지권, 프랑스어 사용, 가톨릭 신앙을 보호하려 했으며, CreeOjibwe 부족도 이 운동에 동조했습니다. Riel은 캐나다 정부와 협상해 **Manitoba Act(1870)**를 이끌어냈고, 이는 Métis에게 토지와 자치권을 보장하는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Riel은 이후 추방당했습니다. 이 반란은 원주민과 Métis가 식민지 확장에 맞서 단결한 첫 주요 저항이었습니다.

 

결론: 조약의 장기적 유산

1815~1870년의 조약 시대는 캐나다 원주민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번호 조약과 로빈슨 조약은 영토를 축소시키며 원주민의 자치권을 약화시켰고, 보호구역 시스템은 전통적 생활을 제한했습니다. 오해와 불이행은 신뢰를 무너뜨렸으며, 서부 확장은 Red River Rebellion과 같은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원주민은 협상과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었고, 이는 이후 투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네 번째 글로, 우리는 조약이 원주민 사회에 미친 복합적 영향을 이해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동화 정책과 기숙학교가 원주민 공동체에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탐구하겠습니다. 캐나다 원주민의 이야기는 그들의 회복력과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참고 자료

  • Miller, J.R. Compact, Contract, Covenant: Aboriginal Treaty-Making in Canada.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9.
  • Daschuk, James. Clearing the Plains: Disease, Politics of Starvation, and the Loss of Aboriginal Life. University of Regina Press, 2013.
  • 원주민 구전 역사 및 캐나다 국립아카이브 조약 문서.